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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간다.
뒤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도도한 흐름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나니, 설사 신이라 불리는 자들도 시간 앞에 자유롭지 못 하리라.
서쪽 숲의 마녀는 고개를 들었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서 나오라 명령하고 있었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진실이 알려지면, 그렇게 되면······.
서쪽 숲의 마녀는 스스로의 어깨를 안았다.
그저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야속함을 느끼며 침묵했다.
초조함 속에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
여전히 반달이었지만 어제보다 밝았다.
별빛 따라 부서져 흩어진 달빛은 하얀 꽃들 위에 점점이 떨어졌고, 별의 무덤은 이름처럼 땅에 떨어진 별들의 땅이 되었다.
“예쁘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깍지 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주변을 돌아보는 코델리아가 보였다.
천사의 등급이 높아짐에 따라 점점 더 분홍빛이 돌기 시작한 머리칼과 발갛게 달아올랐음에도 여전히 하얀 얼굴. 호기심에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
“맞아, 정말 예뻐.”
“그치?”
호응해준 게 기쁜 듯 코델리아가 유더 쪽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마에 입맞춘 뒤 속삭이듯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뻐. 더 예쁜 것 따위 없을 거야.”
어?
뭐라고?
잠깐. 잠깐, 잠깐.
사실 잠깐도 필요 없었다. 유더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뭐가 예쁘다고 하는 건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말이 누굴 가리키는 지.
“유, 유치하거든?”
거기다 느끼하고.
하지만 왜인지 얼굴이 빨개졌다. 이상하게 자꾸 미소가 번졌고 말이다.
[아··· 제발. 이제 제발······.]
[후대, 우리가 있어요. 우리가 있다고요.]
둘만 있는 게 아니라고요.
여기 사람 있어요.
멜리사와 벨렌시아가 참다 못 해 목소리를 내었고, 코델리아는 더더욱 민망해했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누가 보든 뻔뻔하게 행동하던 유더였지 않은가.
뺨을 만지고.
입술을 훔치고, 허리를 안고.
“유, 유더야?”
무서우면서도 기대되고, 싫으면서도 좋고, 부끄러우면서도 즐겁고.
상반된 감정이 뒤섞인 코델리아의 얼굴과 목소리에 유더는 다시 한 번 달아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솔직히 유더 자신이 보아도 지금 상태가 이상하기는 했다.
나사가 풀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것보다는 리미트가 풀린 결과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감정과 욕망들이 마구 분출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속 만지고 싶고, 입술을 맞추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다.
연속된 비극 끝에 겨우 손에 넣은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
“유더야, 나중에. 응? 나중에. 오늘은 할 일이 많으니까.”
타이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에 유더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해묵은 기억과 감정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을 보았다.
코델리아가 유더의 손을 밀어냈다.
아니, 단순히 쳐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엉엉 울며 서러워하는 약혼자를 보듬고 달래주던 어른스러운 그녀.
“유더야?”
“어, 아니. 어, 응.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아니, 애당초 오늘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밤도 있고,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횡설수설 말을 잇다보니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평소처럼 능청스러운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래, 나중에. 약속했으니까 나중에. 기대하고 있을게. 어, 기대. 그것도 엄청.”
마지막에 가서는 씩하고 조금은 음흉하게- 아니, 대놓고 늑대처럼 웃자 코델리아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사, 살려만 줘. 알았지?”
유더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입술을 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진짜 좀 미친 거 같기는 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더 스스로도 제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제 가자. 응?”
“그래.”
“좋아.”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의 손을 깍지 껴잡더니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덩치는 유더가 훨씬 컸지만 코델리아가 이끌고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아··· 이제 정말 끝난 거죠?]
벨렌시아의 한탄 아닌 한탄에 유더는 헛기침을 토했다.
소드 오리진과 하나 된 이상 벨렌시아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말자고 각오하기는 했지만 새삼 민망했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으로만 감사하자.’
요 이틀간 그냥 입 다물고 있어준 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서로 민망했으니까.
그런데 몇 걸음이나 나아갔을까.
이번에는 돌연 코델리아 쪽이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유더처럼 몸이 달아올랐다기 보다는- 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아까··· 네가 한 말 기억나?”
“어떤 말? 코델리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요염하고 청순하면서 착하기까지 하다는 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대화를 포기하고 싶어진 코델리아였지만 꿋꿋이 참아냈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다른 말을 꺼냈다.
“아니, 그 전에, 그러니까··· 하, 하기 직전에 한 말.”
직전.
짐승처럼 폭주하기 전에 속삭인 말.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알아?”
반사적으로 말하자 코델리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굴을 붉힌 채로나마 악동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참은 건데?”
“어?”
“아니, 언제부터 참았냐구.”
코델리아의 공격에 유더는 얼른 시선부터 피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애당초 질문할 때부터 이미 대충은 알고 있던 코델리아였다.
“그랬구나. 야생의 땅부터 꾹 참고 있었구나. 그때부터 날 좋아했구나. 막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데 꾹꾹 참아왔구나.”
흐흐흣 웃으며 놀리듯이 말하자 뻔뻔한 유더조차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흐으응, 흐으응, 유더는 그때부터 날 좋아했구나. 아니지, 사실 그보다 더 전 아니야?”
작은 악마처럼 요염하면서도 사악하게 웃으며 말하자 유더가 다시 움찔했다.
오히려 질문한 코델리아가 놀랄 정도로 말이다.
“잠깐, 진짜야? 그 전부터 좋아했어?”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
북부를 여행할 당시부터.
사랑의 편지를 남기며 열심히 기정사실을 만들던 당시부터.
물론 지금 정도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시간과 비례하듯 점점 더 커져만 갔으니 말이다.
“흠흠, 흠.”
장난스럽게 묻기 시작했지만 유더가 민망해하니 코델리아도 더는 놀리지 않았다.
하지만 흐뭇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어깨를 으쓱으쓱 거렸다.
“내가 이겼당. 내가 이겼엉.”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완승이야.
[그런데 결국 코델리아 님도 유더 님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이건 유더 님의 승리가 아닐까요?]
멜리사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말했고, 덕분에 코델리아는 계속 승리감에 취할 수 있었다.
“흠, 좋아. 음, 좋아. 좋아좋아.”
으쓱으쓱 어깨춤까지 추는 걸 보니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유더는 깨달았다.
‘이젠 진짜 어쩔 도리가 없는 수준이구나.’
코델리아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이.
저러는 걸 보면서도 반발심이 들기는커녕 그냥 귀엽기만 했으니까.
[하아··· 제발. 이 핑크빛 분위기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죠? 우리 파이어 페어리 만나러 가야 하지 않나요? 네? 후대님?]
참다 못 한 벨렌시아가 애원한 덕분에 다시 이야기를 되돌릴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가자.”
“응, 그래.”
다시 깍지를 낀 두 사람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고, 오래지 않아 별의 무덤의 중심에 도달했다.
“누구냐.”
“너흰 누구야.”
“예쁘지만 안 돼. 여긴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야.”
유더와 코델리아가 다가서자 순식간에 곳곳에서 파이어 페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반응이 이전의 페어리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이같은 면모는 여전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호기심을 보이기보다는 경계심을 보였다.
더욱이 표정들도 보면 제법 진지했고 말이다.
[그냥 놀고 있던 것이 아닌 것 같네요.]
벨렌시아의 말에 유더 역시 동의했다.
코델리아가 쥐불놀이라 평했던 파이어 페어리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보초가 순찰을 돌듯이 말이다.
[유더야, 어떡할 거야?]
코델리아의 메시지에 유더는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언제나처럼 초콜릿을 꺼내들며 밤놀이 운운하는 대신 정중히 예를 표한 뒤 말하였다.
“성십자 수호단의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과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입니다. 솔라리 교단이 남긴 석판의 인도를 따라 이 땅에 다다랐습니다. 솔라리의 챔피언 가리우스의 무덤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다른 페어리들이었다면 중간에 말을 끊었거나, 유더가 한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 해 눈을 깜박였을 터였지만 파이어 페어리들은 달랐다.
저들끼리 조금 웅성이는 것 같더니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곧 페어리 나이트께서 오실 거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십여 초 남짓이 지나자 공간 너머에서 전신갑옷을 걸친 파이어 페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어리 나이트.
페어리 퀸의 수호자. 페어리들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병력.
그런데 하나가 아니었다.
보통 페어리 왕국에 페어리 나이트는 하나만 존재하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간 너머에서 완전무장한 페어리 나이트가 무려 다섯이나 나타났다.
“단순히 길을 잃고 들어선 자들이 아니구나.”
“석판의 인도를 받은 자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자들.”
“솔라리 님이 내리신 임무를 완수할 때가 온 걸지도 몰라.”
“여왕님께 데려가야 해.”
페어리 나이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했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조용히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대충 알 것 같네. 예상대로 파이어 페어리들이 가리우스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모양이야.]
유더의 메시지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여왕을 만나야 일이 해결되겠네?]
[아마도 그렇겠지. 겸사겸사 파이어 페어리의··· 불의 가호도 받으면 좋고.]
석판 네 개를 모아 이 곳에 당도한 것이니 페어리 퀸이 자신들을 내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쪽이다.”
“우리를 따라와라.”
저들끼리 회의를 마친 페어리 나이트들이 각자의 병장기로 허공을 가리키니 이내 유더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의 문이 열렸다.
이동 방법 자체도 다른 페어리들과 다른 파이어 페어리들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겁먹지 말고 따라와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 도착한 자라면 두려울 이유가 없을 거다.”
페어리답지 않게 제법 무게감이 어린 말들이었다.
유더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코델리아의 손을 살며시 당겼고, 코델리아는 공간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유더와 코델리아는 아름다운 궁전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춤추듯 흩날리는 홍련에 뒤덮인 장소.
하지만 뜨겁지 않았다.
아침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빛이었다.
“페어리 퀸을 뵙습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정면.
불타는 옥좌 위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는 페어리가 하나.
좌우에는 어느새 나타난 페어리 나이트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왕관을 쓴 하얗고 붉은 머리를 가진 페어리는 예를 표하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이어 페어리 퀸.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한 그녀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말했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나를 마주하라. 솔라리께서 말씀하신 운명의 두 사람이여.”
어찌 보면 평범한 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운명의 두 사람.
세일룬 왕국에서 이미 들었던 표현.
천상의 목소리가 자신들을 가리키며 했다는 말.
그런데 파이어 페어리 퀸이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더욱이 솔라리의 이름을 언급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과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입니다.”
유더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말하자 파이어 페어리 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나직한 목소리에 유더는 미간을 좁혔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더욱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은 또 무엇이고.
단순한 허세일까?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애당초 페어리 퀸부터가 그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을 늘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옥좌에서 일어선 그녀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향해 손을 뻗더니 주문처럼 읊조렸다.
“석판의 인도를 받아 도착한 운명의 두 사람이여. 맹약에 따라 그대들에게 길을 인도하리라.”
공간이 일그러졌다.
초콜릿을 꺼낼 틈도 없이 화려한 불꽃이 일어 거대한 문의 형상을 이루었다.
활짝 열린 문.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검고 어두운 공간.
하지만 그저 어둠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밤을 적시는 달빛처럼 외로이 빛나는 순백의 문이 어둠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라, 그것이 석판을 모은 그대들의 길일지니.”
거기까지 말한 페어리 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옥좌 위에 앉았고, 페어리 나이트들 역시 입을 꾹 닫은 채 저마다의 병장기만을 고쳐 쥘 따름이었다.
[유더야?]
[가자.]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페어리 퀸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들으려면 저 문 너머에- 가리우스의 무덤에 다녀와야 할 터였다.
[알았어, 가자.]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잡았고, 유더는 숨을 크게 골랐다.
어둠 사이에 홀로 자리한 순백의 문.
그 너머에 있을 가리우스의 무덤.
“다녀오겠습니다.”
파이어 페어리 퀸에게 말한 유더는 마지막으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코델리아 역시 유더를 보았다.
“갈까?”
“가자.”
언제나와 같은 교환에 미소가 그려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정면을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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