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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테스 평원에서는 문자 그대로 대회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왕국군 5만 7천과 재상군 6만 2천.
중앙에서 양측의 본대가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측방과 후방에서도 각자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기병대를 이용한 우회기동과 예비대의 참전으로 인한 전선의 변화.
양측의 전력이 비등한 가운데 전술 또한 크게 밀리는 쪽이 없으니 우열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위험하다.’
재상군을 이끄는 바톨레인 원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전장을 노려보았다. 전쟁에서 가장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는 순간은 접전을 펼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느 한 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할 때였다.
당장은 팽팽한 상황.
하지만 그렇기에 어느 한 쪽만 무너져도 한쪽으로 확 기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톨레인 원수에게는 그렇게 만들 변수가 하나 있었다.
‘마인들의 군대.’
악마의 눈의 최상급 마인 카라반이 이끄는 마인 군단.
카라둠 요새를 함락시킨 그들이 마인과 마물들 특유의 체력과 기동력을 살려 이 전장에 합류한다면, 왕국군의 후방을 두드린다면 팽팽한 접전을 순식간에 학살극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전투를 시작하고 벌써 반 시간 남짓.
마침내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급보!”
근방에 있던 통신 마법사의 외침에 바톨레인 원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 있던 부관들 역시 거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어디까지 온 것이냐.
통신 마법의 존재는 과거 전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빠른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전술의 혁명을 불러왔다. 서로 먼 곳에 위치한 부대들이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계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서 말하라!”
참을성이 적은 부관 하나가 윽박지르듯 소리쳤지만 누구도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들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것이!”
통신 마법사는 울상이 되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쥐어짜낸 목소리를 토해냈다.
“져, 졌습니다.”
“뭐?”
“카라반의 군대가 대패했습니다!”
바톨레인 원수는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그것은 부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상도 하지 못 한 이야기.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전개.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나! 어?!”
부관 하나가 통신 마법사의 멱살을 틀어쥐며 윽박질렀지만 이번에도 막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마비된 탓이었다.
“져, 졌습니다! 와해되었습니다! 현재 흩어져서 퇴각 중이라 합니다!”
통신 마법사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는 그저 전해져온 전문을 읽은 것 뿐이었다.
“어떻게.”
온갖 소음이 넘쳐나는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바톨레인의 원수의 작은 혼잣말은 근방에 있던 모두에게 닿았다.
“대체 누가.”
왕국군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자신들처럼 마인들과 마물들을 숨겨두었을 리는 없었다.
아니,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최상급 마인이 지휘하는 칠천에 달하는 군대를 반시간 만에 격파했다?
그 정도의 분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과는 상황이 달랐다.
카라반의 군대는 카라둠 요새를 함락시키며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켰다.
즉, 전선에 나선 순간 그 정도 전력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바톨레인 원수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통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
겨우 만들어낸 문장에 통신 마법사는 숨을 헐떡였다. 다시 한 번 쥐어짜낸 목소리로 답하였다. 스스로도 전문의 내용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두, 두 사람······ 두 사람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부관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입도 열지 못 했다.
두 사람?
두 사람에게 최상급 마인이 이끄는 칠천 군대가, 그것도 마물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반 시간 만에 격파당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통신 마법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직후, 통신 마법사가 꺼낸 한 마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부여했다.
“데몬··· 슬레이어.”
카라반의 군대를 격파한 두 사람.
악마 추종자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그 이름.
바톨레인 원수는 다시 전장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섬광에 욕지거리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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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윽··· 학··· 하······.”
“후우··· 후······ 으······.”
실라테스 평원 인근.
정확히는 한창 싸우고 있는 왕국군과 재상군이 간신히 보일락 말락한 낮은 언덕 위.
유더와 코델리아는 둘다 잔뜩 지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려댔다.
“후으··· 하··· 이, 이거··· 효, 효과··· 있는 거··· 마자?”
“이써, 무조건 이써.”
유더의 등에 업힌 코델리아는 하늘에 연속해서 마법의 빛을 만들어냈다.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붉은 색으로, 마치 금방이라도 전장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유더와 코델리아는 승리했다.
단 둘이서 칠천에 달하는 군대를 패퇴시키는 어마어마한 위업을 달성했다.
물론 둘이서 칠천 군대를 전멸시킨 것은 아니었다.
쓰러트린 것은 일천 남짓.
물론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였지만, 카라반의 분대 전체를 패퇴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숫자였다.
‘-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애당초 군대에서 ‘전멸’은 정말로 병사 전원이 죽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전투 속행 불가능 상태.
최고 지휘관인 카라반과 바로 그 밑이라 할 수 있을 상급 마인 둘이 죽은 순간 마물들의 군대는 머리를 잃은 셈이 되었다.
거기에 연이은 황금빛 폭풍의 질주.
지휘관을 잃은 마물들이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하······ 주게써··· 죽겠다고······.”
코델리아는 결국 반 탈진 상태가 되어 몸을 축 늘어트렸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유더의 체력을 잔뜩 흡수하긴 했지만 또 그만큼 마력을 소모한 터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황금빛 폭풍은 그 위력과 범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마력을 필요로 했고, 아무리 대마법사급 마력을 가진 코델리아라 해도 자력으로는 5분 이상 유지하기 힘든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을 장장 15분 이상 사용하였으니 퍼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아··· 하······.”
사실 죽겠는 건 유더도 마찬가지였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체력을 쪽쪽 잡아먹혔으니 말이다.
[그런 것 치고는··· 멀쩡하지 않나요?]
벨렌시아의 의문은 당연했다.
어느새 뻘뻘 흘리던 땀도 멎었고, 코델리아와 쌍을 이루며 거칠어졌던 호흡 역시 안정세를 찾고 있었다.
“회복이 빠르니까요.”
유더 자신이 무한체력인 이유는 소위 말하는 피통 자체가 큰 것도 있었지만 회복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빠른 것 역시 한 몫을 했다.
조금만 쉬면 금방 다시 회복을 한다고 해야 할까?
빨피 만들었는데 몇 분 뒤에 보면 어느새 풀피 되어 있는 그런 캐릭터라 할 수 있었다.
“가붕이··· 유더.”
무한 회복의 매운 맛을 가장 격렬하게, 죽을만큼 체감한 인물의 발언에 유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효과가 있네.”
미묘하긴 했지만 전선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눈치 빠른 바톨레인 원수가 한 가지 판단을 내렸음에 불과했다.
‘우리가 끼기 전에 발을 뺀다.’
최상급 마인이 이끄는 마물 군대가- 그것도 칠천에 달하는 부대가 대패하여 도주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통신 마법이 발달한 세상이었지만 정확한 전황까지는 알 수 없을 터이니 바톨레인 원수에게는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존재가 너무도 무겁게 다가올 터였다.
‘그런데 그 둘이 지금 가고 있다고 신호를 열심히 보내고 있다 이거지.’
물론 붉은 불빛만으로 그게 유더와 코델리아일지, 그냥 마법사가 만들어낸 빛일지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카라반의 분대가 나타났어야 할 방향에서 거리를 좁혀오는 불빛은 바톨레인 원수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방어 태세로 굳힌 다음에 틈을 봐서 물러나려 할 거야.”
이미 회전이 시작된 마당에 갑자기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것은 재상군이 애당초 카라반 부대의 합류를 기다리는 형태로 병력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즉, 애당초 수비적이었다는 거지.’
그리고 수비적인 것은 왕국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라반 부대의 존재는 왕국군에게도 무척이나 큰 짐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음, 뭔가 뿌듯하단 말이지.”
“하아··· 하······ 뭐가?”
“아니, 우리 둘 때문에 저 정도의 대군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러네?”
“어, 우리 진짜 강해졌나보다.”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검성.
홀로 일군과 대적할 수 있는 대마법사.
“아유, 우리집 사기꾼 검성.”
“응, 우리집 짐승 마법사.”
코델리아와 유더가 서로를 보며 정답게 주고받자 멜리사는 한숨을 토했다.
[후······ 설마 여기서 아앗, 아아앗, 하악하악 너무 좋아! 같은 일을 하지는 않겠죠?]
일반적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두 사람이었으니까.
이미 많은 전례를 보아온 멜리사의 불안한 목소리에 코델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쭉였다.
“누, 누굴 짐승으로 아나.”
[저기요, 애칭이 짐승인 사람이 무슨 말을······.]
거기다 지금까지 본 게 있거든요?
멜리사의 팩트 폭격에 코델리아는 다시 입술을 움츠리더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유더의 뺨을 괜히 꼬집었다.
[아무튼 후대, 이제 어떡할 생각이죠? 이대로 왕국군에 합류하나요?]
“일단은 그래야겠죠.”
짧게 답한 유더는 숨을 크게 골랐다. 여전히 툴툴 거리는 코델리아를 고쳐 업은 뒤 지면을 박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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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행방은 유더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최대한 수비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재상군은 마물들을 퇴각의 제물로 바친 뒤 도주하기 시작했고, 왕국군은 무리해서 그런 재상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마물들을 격파해라!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이다!”
일단 회전이 벌어진 이상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재상군은 이번 전투로 말미암아 1만이 넘는 마물들을 잃었고, 후퇴 과정에서 적잖은 수의 병력을 잃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톨레인 원수는 후퇴를 선택했다.
최상급 마인이 이끄는 칠천 병력을 패퇴시킨 미지의 전력이 본격적으로 전장을 휘젓기 시작하면 재상군 전체가 완패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물들은 어떻게든 보충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겠지만.’
어찌되었든 유더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완전히 지친 코델리아와 그럭저럭 회복하긴 했어도 풀 컨디션은 아닌 유더 자신이 바톨레인 원수가 생각한 것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승리는 승리.’
왕국군은 승리했고 재상군은 패배했다.
그리고 여기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있었으니.
“코델리아!”
“언니이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합류한 지점에 게일과 아델리아가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 이후 못 봤으니 벌써 몇 달 만의 재회였다.
“아유, 우리 동생. 우리 애기.”
“헤헤, 우리 언니.”
적지로 떠난 동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아델리아였다.
감정이 폭주해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코델리아를 반겼고, 코델리아는 그런 아델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의 체온과 체향을 나눈 뒤 얼마나 지났을까.
아델리아가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잠깐.”
“어?”
“아니, 뭔가··· 변한 거 같은데.”
“벼, 변해?”
“어, 뭔가. 뭔가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델리아의 지적에 코델리아는 단번에 얼굴을 붉히더니 뻘뻘뻘 땀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언니.
언니도 짐승이었어.
안 그러면 말이 안 돼.
그도 그럴 것이 얼굴만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누가 봐도 수상쩍은 코델리아의 반응에 아델리아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야, 코델리아. 너 설마?”
코델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며 시선을 피했고, 아델리아는 한숨을 길게 토했다.
착하고 순하고 순진한 동생을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원흉.
사기꾼 겸 짐승은 등 뒤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외면한 채 애써 정면에만 집중하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처제도 건강해 보이고.”
언제나처럼 여유 넘치는 게일의 대답에 유더는 빙긋 웃었다.
확실히 결혼을 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장난기가 줄고 원숙미가 는 것 같은 게일이었다.
‘전장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여기서 게일을 만나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형님, 아버님과 장인 어른께서는······.”
“다른 곳에 계신다. 네가 남기고 간 주머니 덕분에 이래저래 준비할 일들이 많았으니 말이야.”
“잘 전달된 모양이군요. 마이아는 잘 지내나요?”
“그래, 건강해 보이더구나.”
“후우.”
마이아의 안부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토한 유더였다.
검은 사내- 검리에 닿은 유더가 가지고 있던 기억 때문이었다.
‘마이아······.’
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만나고 싶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유더?”
“예? 아, 예. 그보다 형님. 그간의 일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전장이었고, 이제 막 전투가 끝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어쩌면 두 달 사이에 일어났을 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 유더였다.
“알겠다. 다만 처제도 함께 이야기를 하자꾸나.”
그렇게 말한 게일은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를 불러 그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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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7장 - 변수 #3 > 끝
< 제117장 - 변수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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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룬 왕국 만세!”
“만세!”
“이겼다! 이겼어!”
“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환호 소리에 실라테스 평원 전체가 들썩이는 것 같았다.
전투에 의한 흥분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여기에 재상군이든 뭐든 일단 오랜 적이었던 제국군을 꺾었다는 사실이 더해지니 평소 이상으로 기뻐 날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정의는 우리에게 있었던 겁니다.”
젊은 기사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 역시 흥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유치한 소리 말라며 타박을 했을 터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악마 추종자들.
마물들을 전장에 동원하는 사악한 무리들.
이런 적들을 상대로 싸우는데 이쪽이 정의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상황이 좋군.’
명분은 언제 어느 때고 중요한 법이었다.
대의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사들의 사기가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제국군- 아니, 재상군의 일반 병사들은 사기가 꺾일 것이 분명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아무리 꾸미려 한다한들 악마들과 함께 종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 터였다.
황금의 검성 이안 맥클라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검을 늘어트렸다. 황금사자 기사단 특유의 황금빛 갑주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총사령관.
여간하면 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검성이라는 전력을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상대측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루시우스 그란데가 있었다.
검성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같은 검성뿐이었으니 전장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했다.
‘바이엘 백작이 어서 합류했으면 좋겠군.’
바람의 검성.
별의 검성이라 불리는 방랑검 무수가 행방불명된 지금 세일룬 왕국이 믿을 수 있는 검성은 황금의 검성 자신과 바이엘 백작 단 둘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지?’
전장의 흐름이 바뀐 이유.
통신 마법사들을 통해 전해진 정보는 무척이나 제한적이었다.
카라둠 요새를 함락시킨 뒤 전장을 향해 기동 중이던 마물들의 군대가 대파되어 흩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누가 이런 일을 해낸 것인가.
그리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붉은 불빛.
‘아무튼 아군이었으면 좋겠군.’
마물 군단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적은 아닐 것 같았지만 그래도 쉬이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동한다.”
일단 본진으로 돌아가 태세를 정비하고 부상자들을 수습한다.
황금의 검성의 명령에 황금 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뭐라고?”
유더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
유더는 일단 최대한 간추려서 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제국에 넘어간 뒤 로열나이트들을 만난 일, 그들과 함께 황제를 구출하고 그림자 숲을 지난 일, 그 과정에서 소드 마스터 엘리오 롬바르디를 꺾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엘룬과 친구가 된 사정, 제국 외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악마 추종자들의 음모와 분쇄, 마지막으로 솔라리 교단의 최후의 비보가 숨겨져 있던 솔라리의 무덤에 다녀온 일까지.
사실상 회귀인지 평행세계일지 모를 ‘유더들과 코델리아들의 기억’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간추려 설명한 셈이었다.
“정말··· 뭐랄까, 제국에 가도 변함이 없구나.”
왕국에서도 그러더니.
유더와 코델리아만 끼면 일이 엄청나게 커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커질 일에 개입하는 느낌인가.’
어찌되었든 제국에 가서도 어마어마한 활약을 거듭한 두 사람이었다.
황제가 재상이 장악한 제도를 탈출해 북부에서 충성파들을 이끌고 내전을 시작한 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저런 비화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우리 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거야?”
코델리아의 물음에 아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외국인들이니까. 제국 입장에서는 너희 도움을 받은 걸 공표하는 거 자체가 좀 꺼려지는 일이겠지.”
언젠가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일찍부터 떠들고 다닐 이유는 없었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일이지만 뭐··· 이해는 가.”
쯧하고 혀를 찬 아델리아는 새삼 코델리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언니?”
“고생했어. 정말 잘해줬어. 네가 자랑스러워.”
아델리아가 빙긋 미소 짓자 코델리아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잠깐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보이며 기뻐했다.
“언니이······.”
딱히 칭찬에 목마른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정받은 것이 기뻤으니까.
어쩌면 다른 코델리아들이 보아온 처참한 기억들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떤 기억 속에서도 아델리아는 살아남지 못 했으니 말이다.
“으유, 아직도 애기야, 애기.”
주르륵 눈물을 흘린 코델리아를 꼭 안아준 아델리아는 그대로 등까지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언니이.”
“그래, 그래. 언니 여기 있어.”
나이차가 제법 나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어릴 때는 사실상 엄마 노릇을 한 아델리아였다.
“그런데 코델리아야.”
“응, 언니.”
“놈팽이··· 아니, 유더 말을 들어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대체 언제 한 거니.”
“어?”
“아니, 틈이 없었잖아. 틈이.”
그랬다.
제국에 넘어간 이후 정말 바쁘게 뽈뽈뽈 돌아다니기만 했으니까.
“어··· 그게······.”
코델리아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고, 아델리아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유더를 노려보았다. 묻기는 했지만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답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정난 짐승! 놈팽이! 사기꾼!
으리으리한 결혼식도 하고! 정성들여 꾸민 침실에서! 어? 분위기 잔뜩 잡아도 모자를 판국에!
하나하나가 가슴을 찌르는 단어들이었지만 유더는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애당초 눈빛인 터라 뜻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의문이었고, 설사 정말 저런 말들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흠, 그런 민망··· 아니, 민감한 이야기는 일단 좀 미루고······.”
게일이 빨개진 얼굴로 말하자 아델리아 역시 얼굴을 확하고 붉혔다.
코델리아 일이다보니 흥분해서 말이 나오긴 했는데, 게일 말마따나 민망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었다.
“음음, 아무튼 유더. 정말 강해졌구나.”
“예, 형님.”
유더의 대답에 게일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싸우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도가 달라졌다.
아버지- 바람의 검성를 마주할 때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감각을 유더를 마주하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좋구나.’
나이차가 큰 동생에게 추월당한 마당이었지만 질투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병약하던 동생이 이토록 강해졌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이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그저 더 노력해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뿐.
아델리아가 게일에게 끌린 것은 이런 선하고 밝은 면모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로 보기 드문 성품의 소유자였으니 말이다.
“그럼 이쪽도 최대한 간추려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마.”
이러나저러나 아직 전장이었다.
십검호 중의 하나인 게일 자신은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독립부대 취급을 받았지만 그렇다 하여 병력을 물려야하는 이 마당에 언제까지고 길바닥에 서서 이야기를 길게 나눌 수는 없었다.
“50일 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이끄는 충성파와 재상이 이끄는 재상군이 내전을 시작했지.”
제국 중앙에서는 아직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상군은 북진하는 대신 방어선을 굳혔고, 황제군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못 했다.
“절대기사 갤러헤드의 죽음이 공표된 탓이다.”
어린 황제뿐만 아니라 황제파에 속해있던 많은 이들이 믿고 의지하고 있던 로열나이트의 수장.
그의 죽음에 로열나이트들은 복수를 부르짖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황제파들은 두려움이라 하기는 과하지만, 어찌되었든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전선이 고착화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동부의 영향이 클 거다.”
동방대륙에서 넘어온 악마 추종자들이 재상군과 합류하여 제국 동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성십자 수호단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숫자를 당해낼 순 없었다.
“최상급 마인들은 물론이고 작위를 가진 악마들까지 여럿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나마 네 스승님이신 란디우스 님과 카마엘 님이 계셨기에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지 파라곤의 영웅들이 아니었다면 동부의 성십자 수호단은 전멸했을 거란 의견이 많다.”
게일의 설명에 유더는 이를 악 물었다.
분한 일이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뿔의 최상급 마인 자바워크.’
본래라면 영원의 숲의 마수인 자바워크와 하나되어 칠대 재앙 가운데 하나- 괴수 자바워크로 거듭났을 존재.
비록 마수 자바워크와 하나 되지 못 했지만 그는 폭력의 대군주 베헤모스의 아바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존재였다.
원작에서의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능히 란디우스와도 대적이 가능한 괴물이었다.
‘물론 스승님이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강철의 마음, 불굴의 의지, 천하무쌍의 육체.
란디우스를 설명하는 세 단어를 떠올린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디우스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카마엘과 레나, 거기에 벨키안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파라곤의 영웅들 가운데 넷이 함께 있으니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킬 터였다.
“황제파와 동맹을 맺은 우리 왕국군은 제국군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제국 동부에 병력을 파견해 성십자 수호단을 돕는 동시에 실라테스 평원에서 재상군을 압박한다는 것이 기본 전술이지.”
“과연. 그럼 막상 지금같은 전투는 이번이 처음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 네 말대로 이 정도 규모의 전투는 처음이다. 너희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고.”
단 둘이서 칠천에 육박하는 마물 군단을 격파하다니.
솔직히 결과가 이미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주버님, 그럼 아버지랑 시아버지님은요?”
체이스 백작과 바이엘 백작.
“두 분께서는··· 유더가 맡긴 일을 마무리 짓고 계시다. 아마 곧 합류하실 거다.”
“유더가 맡긴 일이요?”
코델리아는 바로 유더를 돌아보며 메시지를 날렸다.
[야, 뭔데. 뭘 또 꾸미는 건데.]
[좋은 일.]
[좋은 일 뭐.]
[일단은 비밀로 할게.]
그래야 나중에 더 놀랄 테니까.
유더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위험한 일이라면 아무리 유더라도 저런 식으로 답하지는 않을 터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야기는 이쯤하고 일단 돌아가도록 하자. 총사령관이신 황금의 검성께도 인사를 드리고.”
게일의 제안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황금의 검성을 도와 함께 북진하는 것이 당장에는 최선의 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한 시간 뒤.
유더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
황금의 검성은 게일의 예상대로 유더와 코델리아를 크게 환영했다.
휘하의 기사들 역시 젊은 영웅들의 활약에 열광했고 말이다.
전투는 승리했고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전력이 새로 합류하였다.
전쟁 중에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유더와 코델리아의 나이와 외모 때문에 다소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자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정말 작은 의심에 불과했다.
고작 겉모습 하나로 깎아내리기에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그간 세운 공이 너무나 많았으니 말이다.
“모두들 수고했다. 오늘밤만은 모두 잊고 승리를 만끽하는 거다!”
“오오오!”
“황금의 검성 만세!”
“왕국군 만세!”
“황금사자 기사단 만세!”
젊은 기사들을 주축으로 신나게 떠들어대니 평소에는 얌전한 참모들까지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댔다.
“자자, 술잔을 들어라! 세일룬 왕국에 영광 있으라!”
“영광 있으라!”
크게 외친 기사들이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서로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하지만 막 서로 잔을 부딪힐 때였다.
“그, 급보입니다!”
막사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입구로 이동했다.
얼굴이 시뻘개진 상태로 헐떡이던 통신 마법사는 쥐어짜낸 목소리로 급보를 전파했다.
“재상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연이어진 보고에 기사들의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대놓고 노여움을 표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제국 서부- 정확히는 엘프들의 본거지인 그림자 숲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이 진군하고 있다.
적진이기에 소식이 느린 것까지 고려한다면 이미 전투가 임박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국- 그것도 지금 싸우고 있는 전선과 먼 곳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왕국의 기사들이 노여움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상군을 이끄는 자였다.
“제일검··· 아니, 반역자 룬 프라우드.”
호국공과 함께 왕국을 저버린 자.
완전히 타락한 그는 마인이 되어 악마 추종자들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유더야.]
코델리아의 부름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긴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코델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황금의 검성이 이끄는 왕국군은 지금 당장 그림자 숲을 도울 수가 없었다.
실라테스 평원에서 재상군을 압박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는 달랐다.
군대는 제국 내부에 침투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짝을 이뤄 제국에 잠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림자 숲을 도우러 간다.
엘룬을 도와 재상군을 막아낸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군대보다도 그들을 이끄는 자가 더 문제였다.
빛의 검성.
제일검 룬 프라우드.
재상군의 선포에 따르면 절대기사 갤러헤드를 쓰러트린 것은 그였다.
애당초 왕국에 있을 때부터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동급인 검성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제일검이니 마인의 힘까지 손에 넣은 지금이라면 갤러헤드를 이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제일검이 그림자 숲으로 향한다.
‘엘룬.’
요정검 벨렌시아의 검기를 잇는 자.
제국의 엘프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녀가 제일검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일검과 엘룬 양쪽의 전력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감이 가슴을 스쳤다.
‘제일검.’
왕도에서 마주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유더 자신의 뇌리 속에 너무나 깊고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인가.’
제일검과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코델리아.”
“응, 유더야.”
코델리아 역시 알았다.
지금이야말로 결판을 지을 때였다.
“그래두 일단 이거 한 잔은 마시구 가자. 응?”
긴장을 풀려는 듯 짐짓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코델리아와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쳤다.
&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홍빛 노을이 하늘과 땅을 뒤섞었고, 다시 그 사이로 보랏빛이 번져 검푸른 어둠을 불러왔다.
낮과 밤이 뒤섞이는 순간.
검푸른 어둠이 주홍빛 노을을 잠식해 들어가며 하얀 달빛과 쏟아지는 별빛을 마중 나가는 때.
레드 게이트 위에 선 엘룬은 동쪽을 보았다.
스칼렛과 대련을 펼치던 루카스 역시 무심코 동쪽을 보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삼키며 재상군이 서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자.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드는 걸?”
작게 웃은 제일검- 악마의 손의 최상급 마인 듀크는 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더와 코델리아가 있을 남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좋은··· 그런 예감이 들어.”
일생일대의- 지고의 쾌락을 맛볼 것만 같은 기분.
제일검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쪽.
지평이 있는 곳.
제일검은 발걸음을 떼었다.
지평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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