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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솔라리.
일곱 대천사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태어난 그녀는 천계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참회의 대천사 알타리엘은 그녀를 완벽한 존재라 불렀다.
심판의 대천사 아우리엘에 비견되는 힘과 사랑의 대천사 에로스와 우열을 가누기 힘든 아름다움, 여기에 정의의 대천사 라구엘만큼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이 더해졌으니 당연한 평가였다.
일곱 대천사들의 맏이인 아우리엘은 솔라리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아니, 아우리엘 뿐만 아니라 천계의 모든 천사들이 솔라리를 사랑했다.
태양의 대천사.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밝고 따뜻한 빛을 나누어 주는 성스러운 존재.
때문에 그녀가 인계에 관심을 보인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지옥의 대군주들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인계는 죽음과 통곡, 비탄으로 가득 찬 곳이 되었다.
수많은 나라들이 무너졌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를 보다 못 한 솔라리는 아우리엘을 비롯한 대천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인계로의 강림을 선택했다.
일단의 무리와 함께 인계- 플레이아데스에 도착한 그녀는 태양의 빛으로 지상의 어둠을 걷어냈다.
많은 이들이 대천사의 기적을 보았다.
갈 곳을 잃은 채 두려움과 절망만을 안고 세상을 헤매던 이들이 솔라리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솔라리는 그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듬었고, 태양의 빛으로 그들의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솔라리를 사랑했다.
절망에서 구해진 많은 이들이 솔라리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라리 홀로 지상의 어둠을 온전히 걷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천계의 대천사들 가운데 둘이 솔라리를 돕고자 지상으로의 강림을 선택했다.
인계의 존재들은 저 드높은 천상에서 온 천사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여겼고, 솔라리는 태양신이라 불리며 지고의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솔라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신으로 군림하며 인계를 좌지우지하기는커녕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 서서 인계의 모두를 보살피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가 되었다.
지옥의 대군주들은 지상에 내려온 태양을 집어삼키기 위해 처음으로 손을 잡았고, 결국 솔라리는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의 검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태양이 떨어진 날.
하지만 솔라리의 의지는 끊어지지 않았다.
솔라리는 최후의 힘으로 오랜 시간 준비해온 의식을 완성하였고, 그 결과 플레이아데스는 천계는 물론이고 지옥과도 이어지지 않은 독립된 세계가 될 수 있었다.
지옥의 악마들은 지옥문을 통하거나 소환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천계의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라리 교단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인계를 위해 헌신한 태양의 여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녀의 뜻을 받들어 지상에 남은 악마들과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더 이상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줄 신이 없음을 알면서도 기도하였고, 계속하여 사랑과 믿음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악마들과의 싸움이 이어질 때마다 솔라리 교단은 조금씩 마모되어갔고, 결국 완전한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솔라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교단은 사라졌지만 교단이 남긴 유산들은 아직도 남아 인계를 위해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유산들 가운데 하나.
솔라리 교단이 멸망의 순간까지도 지키고자 했던 최후이자 최고의 유산.
교단은 아무나 유산을 찾지 못하도록 한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네 개의 석판을 모두 모은 자만이 솔라리의 챔피언 가리우스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고, 다시 자격 있는 자만이 가리우스의 무덤에서부터 솔라이 최후의 유산으로 이어진 길을 알아낼 수 있었다.
“태양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솔라리 교단은 멸망했고, 네 개의 석판 역시 잊힌 과거가 되었다.
누구도 석판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는커녕 아예 석판의 존재조차 알지 못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최후의 유산에 다가서는 자들이 있었다.
&
“안녕!”
“잘 가!”
“다음에 또 놀자!”
페어리들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자 유더 역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엘룬은 뺨을 발갛게 붉힌 채 넋이 나가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 했고,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코델리아는 상태가 살짝 더 심각했다.
“하아······.”
아직 단계를 다 밟은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가 빌려준 책들로 따지면 이제 겨우 문을 두드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키스를 하고, 유더와 자신이 서로를 만지고.
겨우 그게 다였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아니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오른 기분이었다.
유더의 커다란 손.
언제 그렇게 커졌는지 이제는 코델리아 자신의 목은 물론이고 쇄골까지 한 번에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딱딱하고 단단하지만 그래서 더 의지가 되는 손.
평소에도 자주 느꼈다.
뺨을 비비거나 허리를 안기거나, 아무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이전과 달랐다.
평소에는 닿지 않던 곳들.
달리아도 만진 적이 없는 곳들.
‘야해.’
‘만진다’는 단어가 이렇게 야한 단어였던가.
입술을 깨문 채 으으 거리던 코델리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자꾸만 유더의 손이 닿았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잊은 뒤 조금만 더 뻔뻔해지고 마음 먹었다.
아델리아 언니는 처음 키스했을 때부터 이 정도는 했을 테니까.
남들도 이 정도는 다 하는 거였으니까.
‘응응, 맞아맞아.’
이제 겨우 문을 두드린 거에 불과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또 멀었다.
더욱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유더가 아닌가.
‘유더.’
우리집 사기꾼.
음흉하고, 못되고, 치사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 좋아 죽겠어.
왜 이렇게 좋을까. 언제부터 좋았던 걸까.
흐물흐물 뇌가 녹는 기분이었다.
유더 생각만하면 마냥 미소가 그려졌다.
‘문을 두드렸으니까······.’
다음에는 문을 열고, 문을 열고, 문을 열고······.
그 다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섭고 두렵고 흥분되고, 아무튼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유더면 괜찮아.
유더면 좋아.
유더면 무섭지 않아.
더한 것도 괜찮아.
얼굴이 화끈했지만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빨갛고 뜨거웠으니 말이다.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유더를 돌아보았고, 베시시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더야.”
“어?”
“왜 그러고 서 있어?”
약간 비스듬히 선 채로 살짝 허리를 숙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엉덩이를 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뭔가를 감추듯 돌아선 느낌이었다.
“아니, 그. 뭐. 그냥.”
평소답지 않게 별로 뻔뻔해 보이지 않는- 정확히는 뻔뻔하지 못 한 것 같은 유더는 어색하게 웃더니 엘룬에게 말했다.
“엘룬 님.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어? 어. 나도 좋았어.”
엘룬은 뺨을 붉히며 기다린 귀를 몇 번인가 파닥거렸다.
나이는 이백 살이나 되었지만 순수의 결정체나 다름이 없는 그녀였으니까.
오늘 보여준 광경은 자극이 너무 셌을 지도 몰랐다.
‘나중에 빈첸죠가 난리 치는 거 아냐?’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든 유더였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서 계속하는 거야?”
엘룬의 천진한 물음에 유더는 사례라도 걸린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해댔고, 코델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눈동자를 살짝 굴려 유더를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파란색 눈동자에 은근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커흠, 큼. 음. 아뇨. 밤이 늦었으니까요. 그리고 엘룬 님, 오늘 있었던 일은 가능하면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그게 소원이야?”
“부탁입니다만··· 음, 그냥 소원으로 하죠.”
어차피 엘룬에게 부탁할 일은 다 하였고, 코델리아가 제시한 기적의 계산법을 강행하는 것은 양심에도 찔렸으니까.
“응, 약속 지킬게.”
엘룬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제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상상할지 상상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유더는 코델리아의 손을 잡았고, 코델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물러섰다.
“코델리아?”
“어? 아니, 어. 그냥. 조금. 응, 조금. 살짝 놀라서? 내가 본래 잘 놀라잖아? 응응, 맞아. 벌레 봐도 놀라구, 멜리사가 이상한 소리해도 놀라구, 그냥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구?”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무말 대잔치를 늘어놓던 코델리아는 에헤헤 웃더니 유더의 손을 깍지 껴잡았다.
항상 잡던 손인데 오늘 따라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유더도 마찬가지였다.
작고 따뜻한 손.
이렇게 작았나?
이렇게 부드러웠나?
‘진정하자. 진정하자 유더 바이엘.’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해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킨 유더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
“주인님!”
“키라라!”
“주인님!”
“키라라!”
숙소로 돌아가자 제일 먼저 키라라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정확히는 코델리아를 반겨주었다.
오렌지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지쳐 잠들어 있던 그녀였던 터라 이제야 겨우 코델리아를 만난 셈이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두려웠어요.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어요.”
배신도 하지 않았고요.
코델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키라라가 계속해서 말하자 코델리아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키라라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응응, 믿고 있었어. 정말 잘해주었어. 우리 키라라 장해.”
코델리아의 말에- 정확히는 ‘우리 키라라’라는 말에 키라라는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울고 있었다. 도망치면서 한 오만가지 생각을 다시 떠올리며 코델리아에게 더욱 매달렸다.
“주인니임.”
“응응, 우리 키라라.”
어쩔 수 없다는 듯 엄마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키라라를 보듬어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더는 조금 기묘한 것을 보았다.
어쩐지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칼렛.
루카스와 카이사는 각기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진짜 코델리아 말처럼 된 건가?’
루카스와 카이사와 스칼렛의 삼각 관계.
유더 입장에서야 누가 누구랑 이어지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눈앞에서 볼 거라 생각하니 살짝 흥분되기도 하였다.
‘내가 영웅전기2를 좋아하긴 했구나.’
코델리아 때문에 열중한 게임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열중하기는 열중하였으니까.
루카스와 카이사와 스칼렛.
영웅전기2에서는 셋 모두 불행한 인생을 살다간 이들이었다.
분기에 따라 마인이 되는 루카스.
설사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유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 잃어간 끝에 결국 자신의 목숨마저 잃고 만 비운의 검사.
스칼렛은 영웅전기3편 후반부까지 생존하기는 했지만 그녀도 만신창이였다.
영웅전기2에서 마검에게 몸을 뺏긴 이후 저지른 수많은 악행과 패륜, 존속 살인들이 그녀의 양심과 영혼을 끝없이 괴롭혔으니 말이다.
그나마 카이사는 나았지만, 그녀 역시 순탄치 못 했다.
말레키스에 의해 고향과 가족,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끼고 사랑해온 부하들까지 모두 잃고 복수귀가 되어야만 했던 그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카스는 마인이 되지 않았고, 스칼렛은 마검에 빠져들지 않았으며 카이사는 고향을 잃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펼쳐질 수 없었던 러브 코메디 같은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실이 유더를 기쁘게 하였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런 걸 보고 싶었으니까.
이런 세상을 원했으니까.
원작을 보면서.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왔으니까 나도 슬슬 자러 갈게.”
짧게 말한 스칼렛은 돌아섰다.
아무래도 키라라 혼자 기다리게 하는 게 뭐해서 같이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은근히 상냥하단 말야. 그치?”
코델리아가 므흐흣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스칼렛은 생긴 것만 매섭지 무척이나 착하고 상냥했다.
“키라라는?”
“잠든 것 같아. 긴장이 풀렸나봐.”
부드럽게 미소 지은 코델리아는 아기처럼 잠든 키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다음날 아침 일행은 바로 오렌지 게이트를 떠날 채비를 하였다.
갈 길이 먼 것도 있었지만, 간밤에 내려온 천상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황태후는 무슨 이야기가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얼굴로 보아 무언가 기쁜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서둘러 버킹엄 후작의 땅에 가야 합니다.”
황제에게 타이르듯 말한 그녀는 먼저 마차 위에 올랐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각자 엘븐스티드 위에 탄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잘 가. 또 만나. 대련 한 번 더하고 싶어. 그 뒤도 보고 싶고. 응. 궁금해.”
주절주절 이어지는 엘룬의 인사말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벨렌시아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후대, 까맣게 물들이는 건 코델리아만으로 부족했나요?]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고 멜리사는 비슷한 말을 코델리아에게 하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림자 기사단과 더불어 선두에 선 레온과 사라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가 출발하였다.
이른 아침.
루카스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각기 말을 몰며 나아가는 카이사와 스칼렛.
코델리아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앉은 키라라.
유더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제국의 북부- 버킹엄 후작의 영지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
< 제110장 - 선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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