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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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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곧게 뻗은 길 너머에 자리한 지평의 광경은 이내 아지랑이처럼 사그라졌다.
단지 본 것이었다.
아직 지평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똑바로 서서 지평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검성.’
유더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룬과 동수를 이루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요정검 벨렌시아도 유더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과 겨루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것은 아니었다.
초월적인 신체 능력과 소드 오리진의 특성, 여기에 더해진 구천구문의 압도적인 기운이 더해진 결과 검술 실력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투력을 갖춘 것에 불과했다.
만약 벨렌시아가 없었더라면.
그녀의 검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엘룬과 동수를 이루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유더는 자력으로 지평을 보았다.
깨달음을 얻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과, 저 검의 괴물들과 진정으로 같은 눈높이를 갖추게 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
검술 실력이 부족하던 와중에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투력을 갖추었던 자가 진정으로 검성에 어울리는 실력을 겸비하게 됨에 따라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전투력의 상승.
‘기억.’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얻은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통해 획득했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다시 한 번 손에 넣었다.
“기억.”
다시 읊조린 유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절망 대신 희망을 품은 녹색 눈동자에는 이제 검의 지평 대신 다른 것들이 보였다.
이미 아득해진 기억들.
하지만 하나하나 실감할 수 있었다.
결코 거짓된 기억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야생의 땅의 야만족들과 북부의 전쟁.
아버지 바이엘 백작과 형 게일의 사망.
계속된 싸움 속에 죽어가는 이들.
불타버린 고향과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하다 숨을 거둔 마이아.
적으로 마주한 스칼렛과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카이사.
루카스는 좋은 호적수였다.
아니, 최고의 친구였다.
하지만 마인이 되고 말았다.
적에게 붙잡혀 강제로 마인이 되었고, 유더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최후의 순간 성검 바리다사 덕분에 인성을 회복한 그가 남긴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한 사람.
유더 자신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유더 자신이 싸워야만 했던 이유.
“코델리아.”
약하고 겁 많은 약혼자를 누나처럼 보듬어주던 소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태양같은 여인.
마인이 되었다.
유더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베어야만 했다.
“하윽··· 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세상 전부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이 불러온 절망감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하악.”
숨이 거칠어졌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코델리아.
코델리아.
코델리아.
계속 싸워야만 했다.
코델리아의 유지를 이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코델리아가 사랑했던 세상을 지키고자-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사람.
가슴이 까맣게 불타 재밖에 남지 않은 사람.
“코델리아.”
유더는 울면서 그리 말했다.
격앙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희열 뒤에 찾아온 어마어마한 슬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코델리아가 자신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안도, 감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
“유더야.”
코델리아는 억누른 목소리를 내었다.
유더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통에 정말로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고통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유더의 눈물.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유더.
“괜찮아, 괜찮아.”
코델리아는 다정하게 말하며 유더를 보듬었다.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달래주었다.
예전에.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순간 위화감이 들었지만 코델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코델리아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두 팔에 힘을 푸는 유더와 얼굴을 마주하였다.
“코델리아.”
“그래 나 맞아. 어디 안 가. 여기에 있어. 항상 곁에 있을 거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처럼, 가슴에 오랜 시간 담아온 이야기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코델리아는 유더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을 닦아주며 입술을 맞추었고, 숨이 거칠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달뜬 숨을 토했다. 똑같이 헐떡인 유더에게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정신이 좀 들어?”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코델리아를 꼭 끌어안은 뒤 스스로의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아.”
코델리아의 말처럼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순간 유더 자신의 감정을 완벽히 지배한 기억들.
검은 사내의 것이었다.
검리에 닿은, 바람의 검을 구사하는 유더 바이엘의 기억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
원작의 유더가 아니었다.
영웅전기2의 유더는 야생의 땅과의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인 바이엘 백작과 형인 게일을 잃지만, 코델리아와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최악의 루트.’
검은 사내의 결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 과정 자체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 결말 또한 결코 평온하지 못 했으리라.
“하아··· 하······.”
유더는 코델리아의 온기에 의존했다.
터무니없이 부드러운 몸을 꼭 끌어안으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기억.’
검은 사내의 기억.
어떻게 된 것일까.
원작의 유더가 아니라면 그 유더는 대체 누구인 것일까.
평행 세계?
다른 세계선의 유더 바이엘?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왜지?’
어째서 유더 자신이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여러 가지 가설들이 떠올랐다.
첫째는 역시 평행세계의 기억.
어떠한 연유에서 평행세계의 유더가 경험한 일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둘째는 회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유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
검은 사내의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던- 유더 자신이 과거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지만 유더 자신이 검은 사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평행 세계 가설보다는 설명이 잘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생의 기억은?’
유더 자신은 강진호였다.
플레이아데스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은 강진호로서 영웅전기2를 플레이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귀라면 강진호의 기억은 무엇일까.
강진호로 살아온 인생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둘째는 회귀 자체가 가능한지의 여부.’
마법이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이미 기상천외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유더였다.
하지만 회귀는 이야기가 달랐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어쩌면 우주 전체의 시간을 되돌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
그런 것이 허락된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가능은 한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검은 사내의 기억은 흐릿해져만 갔다.
‘코델리아와 이야기해 보자.’
회귀든 평행세계이든 유더 자신만의 일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델리아에게도 홍유희의 기억이 있었으니, 유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하아.”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솔라리의 마지막 비보를 얻기 위한 시험을 보던 중이었다.
일단은 시험의 합격 여부가 중요했고, 어쩌면 가리우스에게 검은 사내의 기억에 관해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진정하자.’
천천히 숨을 고르자 새삼 품에 안고 있는 코델리아의 존재가 분명히 느껴졌다.
너무나 작고 가녀리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따뜻한······.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딱딱해.”
코델리아가 아주 작게 말했고, 유더는 이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건 그······.”
하지만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는 타박하는 대신 빙긋 웃었고, 유더의 가슴을 살며시 밀어내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일단은 시험부터 합격했는지 알아보자.”
나머지는 전부 다음에.
일단은 시험부터.
본래 흥분한 쪽을 이성적으로 이끄는 것은 유더의 역할이었는데, 지금은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그러자.”
“응, 좋아.”
다시 씩 웃은 코델리아는 경기장 밖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시험은 통과한 거죠?”
“통과했다.”
시원한 대답에 만족한 코델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 뒤 유더의 가슴에 콩하고 머리를 박았다.
“역시 우리집 짐승다워. 이따 상 줄 테니까 기대해.”
상.
무슨 상일까.
유더는 얼굴을 붉힌 채 흠흠 거렸고, 코델리아 역시 빨개진 얼굴로 다시 웃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죠.]
[아무튼 진도 좀 나가죠. 그 진도 말고 이야기 진도.]
벨렌시아에 이어 멜리사가 말하자 새삼 정신이 든 유더가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가리우스 님, 지금 제가 상대한 자는······.”
“그대가 기억하는 최강의 검사이다.”
고객센터의 매크로 대답처럼 가리우스의 사념이 빠르게 답했다.
아마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만 내놓을 것 같았다.
“저기,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지?”
코델리아의 물음에 가리우스가 선선히 답하자 유더 역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메시지 마법으로 빠르게 답한 코델리아는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지금 상대한 유더··· 여기서만 부를 수 있는 건가요?”
슬픈 눈을 한 유더는 어마어마하게 강했으니까.
다시 그 슬픈 눈을 마주하는 것은 싫었지만, 그래도 만약 불러낼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오.”
코델리아의 발상에 감탄한 유더 역시 기대어린 눈으로 가리우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리우스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무리다. 그는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 일종의 환상. 사실 이 공간 자체도 환상에 가깝다. 경기장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지.”
“아.”
가리우스의 말대로였다.
어마어마한 싸움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는 어디 하나 긁힌 곳조차 없었다.
재생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부서지지 않은 것이었다.
[아쉽네.]
그래도 어쩐지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슬픈 눈을 한 유더를 보는 건 정말 너무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되었구나.’
그 후에.
자신이 떠나간 뒤에.
“코델리아?”
“어? 어, 응. 아니. 그냥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헤헤헤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몸을 기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한 팔로 안은 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쉬었다 갈까?”
“지, 지금? 지금 쉬면 진짜 탈 날 것 같은데······.”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유더는 이해했다. 그랬기에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거 말고. 진짜 쉬는 거.”
정말로 그냥 쉬는 거.
어쩌다 이렇게 야한 생각만 하는 아이가 된 것일까.
“야, 너 때문이거든? 지난 며칠을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코델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표정을 유지한 유더는 돌연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일단 내려가자.”
언제까지 경기장 한복판에 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이런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런 생각도 안 드네요.]
[저도 그래요.]
멜리사와 벨렌시아가 다시 한 마디씩 보탤 때였다. 코델리아가 문득 유더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더야. 너 방금 더 세진 거 맞지?”
“맞아.”
벨렌시아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만은 분명했다.
“신난다.”
코델리아는 안긴 채로 어깨를 으쓱으쓱 거렸고, 유더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서로 강조했듯이 때와 장소를 가릴 때였다.
“잠깐 물러가 있을까?”
가리우스의 사념이 솔깃한 제안을 했지만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델리아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 시험을 통과한 자로서 청하였다.
“솔라리의 챔피언이시여, 마지막 비보로 이어진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새삼 예를 표하며 말하자 가리우스 역시 진지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태양의 영광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축복의 말을 전한 가리우스는 검을 뽑아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금으로 된 커다란 아치형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 문 너머에 자리한 장소.
영웅전기2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고리와 날개가 반응했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문 너머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코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솔라리 교단 최후의 비보.
챔피언 가리우스의 무덤에서만 닿을 수 있는 장소.
파이어 페어리들이 오랜 세월동안 진정으로 지켜온 성스러운 영역.
“솔라리······.”
코델리아의 날개가 빛나기 시작했다. 천사의 고리는 평소보다 더 강한 빛을 내었고, 코델리아가 가진 천사로서의 성스러운 힘이 배가되었다.
황금의 문 너머에 자리한 태양이 가득한 장소.
태양신 솔라리의 무덤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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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5장 - 솔라리의 비보 > 끝
< 제115장 - 솔라리의 비보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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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대천사 솔라리.
플레이아데스에서는 태양신이라 불리는 그녀.
솔라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지옥의 대군주와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대군주와 함께 공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그녀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죽음을 가장하고 몸을 숨긴 것뿐이다.
천계로 돌아가 힘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지상을 구원해줄 것이다.
유더와 코델리아조차도 정답은 알지 못 했다.
영웅전기3에서 등장한 여러 대천사들이 솔라리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여럿 했기에 죽음을 인지하고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가 플레이아데스에 무엇을 남겼는지까지는 알지 못 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도- 아니,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태양신 솔라리.
그녀는 인계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최선을 다하였다.
솔라리의 교단이 사라진 것도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솔라리를 기억했다.
스스로를 불태워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던 모든 이들에게 빛과 온기를 나눠준 그녀에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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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의 무덤······.”
영웅전기 시리즈의 신들은 추상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천계의 대천사.
분명한 실체를 가진 존재.
때문에 그녀에게도 무덤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가리우스를 비롯한 성기사들의 무덤까지 만든 솔라리 교단이 자신들의 여신을 기억할 추모의 장소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단지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 했을 뿐.’
솔라리의 교단이 사라진 것도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었다.
성십자 수호단이 비록 솔라리 교단의 많은 것들을 이어받았지만 솔라리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는 물려받지 못 하였다.
‘애당초··· 석판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도 우리가 최초니까.’
카마엘조차도 석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즉, 석판을 모아 여기까지 온 것은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 두 사람이 최초란 뜻이었다.
‘파이어 페어리 퀸의 반응도 그랬고.’
운명의 두 사람.
신경 쓰이는 단어였다.
특히 지금처럼 평행세계인지, 아니면 정말 과거에 겪었던 일인지 모를 다른 유더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갖게 된 지금이기에.
‘잠깐, 그러고 보니.’
파이어 페어리 하니 불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엄격 근엄 진지하다고는 해도 페어리는 페어리인지 파이어 페어리 퀸의 어마어마함 마이 페이스에 말려들어 깜박 놓친 것이었다.
“가리우스 님.”
“말하라.”
“솔라리 님의 무덤에 방문하는 일··· 조금 미뤄도 될까요?”
“유더야?”
유더의 제안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와서 뜸을 들이다니 유더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더는 무어라 설명하는 대신 일단 가리우스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고, 코델리아는 바로 반응했다.
가리우스의 팔에 매달리며 간청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네?”
이유야 모르겠지만 필요하니까 한 거겠지.
그러니 일단은 전력을 다해 돕는다.
‘어차피 생각은 유더 몫이니까!’
행동하는 건 코델리아 자신의 몫이고.
유더가 들었다가는 통곡을 할 적재적소였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흠··· 반드시 지금 들어갈 필요는 없다.”
모양이 좀 빠질 뿐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와, 정말요? 정말 감사해요.”
코델리아가 활짝 웃자 가리우스도 웃었고, 유더는 일이 잘 풀렸음에도 꽁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 코델리아가 가리우스의 팔을 끌어안고 있는 게 신경 쓰여서였다.
때문에 유더는 빠르게 말했다.
“시간을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요?”
“하루 안에만 돌아오면 된다. 음··· 그냥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해주는 쪽이 낫지 않나?”
가리우스가 씩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쓰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기 때문이다.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쪽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더야?]
때마침 들려온 코델리아의 메시지에 흠흠 헛기침을 토한 유더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럼 나갔다가 한나절··· 아니, 하루 안에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리하도록.”
가리우스가 후훗 웃으며 물러섰다.
외모만 보면 많이 잡아봐야 30대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노인에 가까운 그였다.
“가자, 코델리아.”
“응? 어, 응.”
유더가 손을 내밀자 반사적으로 마주잡은 코델리아는 얼굴을 확하고 붉혔다.
손이야 백날천날 잡는 거였지만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상을 받고 싶었어? 잠시도 못 참을 정도로?]
코델리아의 메시지에 유더는 움찔했다.
코델리아가 약속한 상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아닌 건 또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음··· 그것도 있지만 다른 중요한 일도 있어서.]
[뭔데?]
[파이어 페어리.]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잠깐뿐이었다.
[불의 가호!]
[맞아, 어어어 하다 보니 놓쳤잖아? 일단 그것부터 얻자.]
[응응, 보스전 하기 전에 정비하는 건 필수니까.]
휘황찬란한 문과 그 너머에 자리한 솔라리의 무덤.
RPG의 법칙에 따르자면 저 너머에 들어선 순간 보스전이 시작될 터였다.
‘물론 진짜 보스전을 할 것 같진 않지만.’
설마 솔라리의 망령 같은 게 튀어나오겠는가?
태양신인데?
그보다는 차라리 무덤을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와의 싸움이 더 그럴싸 했다.
‘뭔가 말하다보니 진짜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강적과 한바탕 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새로이 보게 된 검의 지평.
그로 말미암아 강해진 자신.
[아무튼 나가서 불의 가호부터 얻자.]
[응, 그런데 유더야.]
[왜?]
[가호만 얻고 그냥 올 거야?]
그냥?
시간이 하루나 있는데?
요망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유더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뒤로 살짝 빼더니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발걸음을 내디뎠다.
“딱딱해.”
코델리아가 놀리듯 말했고, 유더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발걸음만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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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원하는가? 원한다면 주겠다.”
불의 가호를 얻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가리우스의 시험을 통과했으니 굳이 또 다른 시험을 내릴 필요 따윈 없겠지.”
“쿨하십니다.”
“여왕님 최고!”
유더와 코델리아의 연이은 찬사 앞에서도 포커 페이스를 유지한 파이어 페어리 퀸은 두 사람이 팔에 찬 요정의 맹약에 불의 가호를 넣어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땅, 불, 바람.
모두 합쳐 일곱 개의 가호.
[물만 남았어.]
사계와 사성의 가호를 전부 다 모으기까지 앞으로 하나.
영웅전기 시리즈 최강의 가호이자 환상의 가호라 불리는 요정왕의 가호까지 이제 정말 한 걸음만 남은 셈이었다.
“헤헤, 헤헤헤.”
코델리아의 입에서 절로 해맑은 웃음이 흘러나오자 유더 역시 웃었다. 제일 급한 용무를 마쳤으니 이제 다음을 해결할 차례였다.
코델리아가 약속한 상.
유더의 손이 허리를 감싸자 코델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유더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입꼬리가 흐물흐물해.]
[너도 그렇거든?]
힘들어 죽겠다더니.
[진짜 힘들긴 하거든? 엄청 버겁거든?]
[그럼 힘 좀 뺄까?]
[그건 좀······.]
코델리아가 수줍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자 유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새삼 다시 허리를 빼더니 바로 코델리아를 안아들었다.
“그럼 페어리 퀸이시여, 잠시 물러나 정비를 한 뒤 돌아오겠습니다.”
“그리하거라.”
파이어 페어리 퀸이 허가하자마자 유더는 급히 몸을 날렸다.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품에서 꺄-하고 작은 비명을 터트렸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두 사람.
[진짜 발정난 거 같아요.]
[그걸 이제야 알았나요.]
멜리사와 벨렌시아.
두 사람은 동시에 쓴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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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하아··· 하······.”
땀으로 범벅이 된 코델리아가 유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거친 숨을 토했다.
고통과 희열.
지쳐 죽을 것 같으면서도 가슴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
그리고 또 하나의 감정.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안도감.
유더가 있다.
코델리아 자신이 그 곁에 있다.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이상할만치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만치 말이다.
“이상한··· 아니, 슬픈 기억이었어.”
유더가 코델리아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시험을 끝낸 직후 격렬해진 감정.
타인의 것이라 여기기 힘든 기억의 파편들.
유더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단편적인 기억들이지만 검은 사내의- 검리에 닿았던 유더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입에 담았다.
“최악의 루트······.”
모든 것을 잃고 복수귀가 된 유더.
마인이 되어 유더의 손에 목숨을 잃은 코델리아.
유더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코델리아는 가슴의 격통을 느꼈다. 아까 이상으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실 나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남부를 여행하던 중에 보았던 꿈 속의 이야기들.
처음에는 흐릿했다. 하지만 유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련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최후의 순간에나마 인간으로 되돌아왔지만 유더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싫어 마인을 가장하다 죽은 코델리아.
검은 사내의 기억처럼 유더에게 미안하다며 속삭인 뒤 숨을 거둔 코델리아.
그리고 마인이 되어 유더를 희롱하고 괴롭히던 코델리아.
모두가 끔찍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랬기에 그저 꿈으로 치부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그저 단순한 꿈이 아니라면.
평행세계든, 아니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면.
“회귀 같은 거··· 말하는 거지?”
“확실하지 않아. 그보다는 차라리 평행세계 쪽이 좀 더 말이 될 거야.”
어떠한 연유로 인해 평행세계의 기억들이 자신들에게 전송된 것이라면.
그 순간이었다.
코델리아가 돌연 몸을 움츠렸다. 손이 작게나마 떨렸다.
“코델리아?”
“아니, 그··· 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무섭다니?”
“우리 기억들··
· 그러니까··· 유더랑 코델리아가 되기 전의 기억들.”
전생.
영웅전기2의 썩은물인 두 사람.
만약 두 사람의 기억이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면.
평행세계의 기억들처럼 그저 전송된 타인의 기억들이라면.
정체성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유더와 코델리아인 동시에 강진호와 홍유희였으니 말이다.
“아직 몰라. 평행세계의 기억이라는 보증도 없고.”
유더는 코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리 말하자 코델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심코, 아니, 어떤 인도에 따르듯 작게 속삭였다.
“솔라리의 무덤에 가면··· 조금 더 알 수 있을까?”
이 기억들이 무엇인지.
운명의 두 사람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 그럴 거야. 그리고··· 어찌되었든 내가 나라는 것과··· 코델리아 네가 코델리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그러니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뻔하디 뻔한 말이었지만 든든한 말이기도 하였다.
“둘이 함께라 다행이야.”
혼자가 아니라서.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어서.
“그런데 유더야.”
“왜?”
“아니, 자꾸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거 같아서?”
유더는 대답하는 대신 마저 손을 움직였고, 코델리아는 움찔하더니 이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쭉 빼 유더의 목을 깨물었다.
&
“정말 하루 만에 왔군.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딱 맞춰서.”
가리우스의 말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수줍게 웃었고, 멜리사와 벨렌시아는 미적지근한 눈이 되었다.
[그냥 둘 다 짐승이에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목소리를 흘려듣는 것쯤은 일도 아닌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유더는 태연한 얼굴로 가리우스에게 말했다.
“가리우스 님, 부탁드립니다.”
“음, 알겠다. 준비하도록.”
시원하게 답한 가리우스가 수인을 맺자 다시 한 번 황금색 아치형 문이 나타났다.
“태양의 영광이 항상 함께하기를.”
“근육이 항상 함께하기를.”
솔라리의 기도문에 란디우스의 기도문(?)으로 응답한 코델리아는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보며 숨을 골랐다. 새삼 다시 유더의 손을 꼭 잡은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문턱.
그 너머.
솔라리의 힘으로 가득한 공간.
코델리아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유더가 없었다.
방금까지도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사라져 버렸다.
‘침착하자.’
유더가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은 아니었다. 멀리 있어도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있는 체이스 백작의 팔찌에 박힌 보석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더는 살아 있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
‘결계.’
최소한 그 비슷한 것.
코델리아는 문라이트를 돌아보았다. 멜리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 공간 자체가 현실이 아닌 꿈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솔라리시여.”
낮게 읊조리며 코델리아는 천사의 광익을 활짝 폈다. 이제는 완전히 분홍빛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머리칼이 빛의 고리에서 발산된 기운에 밀려 넘실거렸다.
코델리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따뜻하고 정겨운 솔라리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정면을 보았다.
붉은 하늘과 푸른 대지.
그 사이에 선 한 명의 여인.
“안녕.”
붉은 머리의 대천사.
태양신 솔라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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