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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연쇄였다.
하나가 무너진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도미노가 무너진다.
서로 공명하듯 계속해서 이어진다.
&
제일검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눈앞에서 빛을 발하는 성왕십자검에 광소를 터트렸다.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레스벨그 백작 이상이군.”
신성검 프레드릭 흐레스벨그.
북부를 지키는 갈까마귀들의 수장.
그의 성왕십자검을 견식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루카스의 손에 쥐어진 성왕십자검이야말로 완성형에 가깝다.
진정한 성왕의 검은 흐레스벨그 백작이 아닌 루카스의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루카스는 분명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흐레스벨그의 기린아라는 별명은 허언이 아니었고, 당장 제일검 자신도 유더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루카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검호에 근접한 수준까지 성장한 것도 대단한 것이었는데 성왕십자검을 완성했다?
“뭔가가 있군.”
제일검 자신이 알지 못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뭐, 상관없겠지.”
이유야 어찌되었든 루카스가 저리 강해졌으니까.
탐나는 먹잇감이 되었으니까.
제일검은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새로이 여벌 검을 뽑아들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도를 보였다.
“자, 루카스. 오랜만에 놀아보자꾸나.”
친근하게 건넨 말에 루카스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순백의 십자가를 곧이 세운 채 숨을 가다듬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서도 명료했다.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길 너머에 나타난 지평.
그리고 그 지평으로 하염없이 이어진 길.
길에 서 있던 남자를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남자는 루카스 자신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을 쌓은···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상처로 마음이 망가진.
그는 미래의 자신일까?
아니면 빌트바인 영웅전에도 나온 적이 있는 다른 길을 걸어간 자신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
자신이 한 발 한 발 나아갔던 길.
타인의 경험 같지가 않았다.
루카스 자신의 경험이었다.
던전 북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환상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었다.
‘빌트바인이 되어줘.’
자신이 남긴 마지막 말.
루카스는 숨을 길게 토했다. 눈앞에 자리한 제일검을 똑바로 보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룬 프라우드.”
빛의 검성.
악마의 손의 최상급 마인 듀크.
검마.
제일검.
이렇게 적으로 만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카스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제일검들 가운데서 눈앞의 제일검이 최강이었다.
그보다 강한 제일검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벅찬 상대.
하지만 루카스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와라.”
루카스의 말에 제일검이 웃었다. 신나게 웃으며 지면을 박찼다. 루카스를 향해 돌진하면 빛의 검격을 퍼부었다.
빠르다.
정말로 빛과 같은 검격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 모든 것을 보려하지 않았다.
일부는 보고 일부는 느꼈다.
아직 검리에는 닿지 못 했지만 지평을 바라보는 자로서 대응했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마치 벼락처럼 이어졌다.
순백의 스파크가 주변을 뒤덮었고, 제일검의 눈에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다.
루카스의 검은 화려하지 않았다.
제일검 자신의 공세에 맞춰 똑같이 속도를 높인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절도 있게 모든 검격을 막거나 튕겨내거나 피해내고 있었다.
철저한 기본기.
수수하지만 그렇기에 단단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검.
쾅!
제일검의 검이 다시 튕겨나갔다. 루카스가 처음 그러했던 것처럼 제일검의 검로를 파괴했다.
하지만 제일검은 검을 놓치지 않았다. 루카스의 공격이 가해진 방향에 몸을 맡겼다. 힘의 진행에 순응하여 부드럽게 회전하였고, 사나운 검기를 루카스에게 내쏘았다.
콰가강!
하지만 이번에도 루카스의 검이 검기를 파괴했다.
흔들리지 않는 성처럼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제일검은 그런 루카스를 계속 두드리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섰다.
루카스 역시 제일검에게 달려드는 대신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정돈했다.
엘룬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그저 자기만족에 가까운, 사실상 구도의 수단인 엘룬의 검에는 살의는 물론이고 공격성 그 자체가 부족했다.
사실상 싸우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똑같이 검성급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일검 자신에게 엘룬이 너무나 쉽게 패한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루카스의 검은 엘룬의 검과 달랐다.
오랜 수련과 그에 뒤지지 않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전사의 검 그 자체였다.
숨어있던 키라라에게 엘룬을 맡긴 스칼렛은 바로 카이사의 상처를 치료했다. 루카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검호들의 싸움은 항상 저랬다.
지축을 뒤흔들고 하늘을 떨게 만들었다. 단련된 검기로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칼렛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카이사와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도, 루카스와 대립하였을 때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것이 분명함에도 낯설기 짝이 없는 기억들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루카스의 품에서 숨을 거두던 자신.
루카스와 사랑을 나누던 자신.
루카스와 나누었던 마지막 입맞춤.
‘집중하자, 집중하자 스칼렛.’
스칼렛은 억지로 정신을 집중했다. 카이사의 상처 치료에만 온 생각을 모았다.
카이사는 그런 스칼렛을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저 가는 목을 부러트려 죽이고 싶다는 충동과 품에 꼭 안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하윽··· 읏······.”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됐어.”
스칼렛의 말을 들으며 카이사는 이를 악물었다.
상반된 충동을 억누르며 소리에 집중했다.
루카스가 제일검과 싸우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루카스에 대한 애정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낯선 감정과 기억들.
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카이사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분명했다.
함께 스칼렛에 맞섰었다.
오직 어둠뿐인 세상에서 절망하는 대신 서로를 위로하며 의지를 다졌었다.
그런 자신을 찌르는 루카스.
루카스를 죽이기 위해 신수의 힘을 개방하는 자신.
어지러웠다. 이지로 세상을 보는 스칼렛과 달리 본능과 감성으로 세상을 보는 카이사였기에 더욱 큰 혼란을 느꼈다.
“루카스.”
쾅!
루카스와 제일검의 격돌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제일검의 공격은 한층 더 가열차게 변했고, 루카스의 십자검이 발하는 빛은 검격이 거듭될 때마다 오히려 더 강해져갔다.
제일검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루카스는 물러나지 않았지만 부담을 느꼈다.
제일검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변하였다. 육신 그 자체가 강화되어 검에 실리는 힘이 더 강해졌다.
그에 따라 한층 더 빨라지는 속도.
다시 한 번 몰아치는 빛의 연격.
루카스는 숨을 멈추었다. 악을 멸하는 성왕의 빛을 더욱 증폭시켰다.
길 앞에 서 있던 자신.
온전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루카스 자신의 육신이 길 앞에 선 자신의 것만큼 단련되지 못 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포기하는 대신 집중했다.
제일검은 눈속임 따위 쓰지 않았다. 순수한 힘과 속도만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인화.
마인이 된 제일검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여러 번 맞선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전들과는 달랐다.
지금의 제일검은 그간의 모든 제일검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자였다. 가장- 순수한 검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쾅!
도미노가 넘어졌다.
최초의 도미노가 넘어짐에 따라 나머지 도미노들 역시 넘어지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다른 자신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일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하나 존재했다.
콰가강!
아득히 먼 지평.
그 지평으로 이어진 길.
제일검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검의 지평에 닿기 위해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지만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분에 초조함을 느꼈다.
쾅! 쾅! 쾅! 쾅! 쾅!
제일검은 완전한 마인이 되었다.
눈에서는 노란 안광이 일었고, 전신의 피부는 창백하게 변했다. 머리 위로는 여섯 개나 되는 뿔이 솟구쳐 올랐다.
“너는 여기서 죽을 거다.”
제일검이 말했다.
루카스를 향해 쏟아내듯 말을 이었다.
“네 저항은 소용없는 일이 될 거다.”
널 죽이고 스칼렛을 죽이고 카이사를 죽이고 엘룬을 죽이고 레드 게이트의 모두를 죽이고.
악의가 솟구쳐 올랐다.
이유 모를 초조함에 증오를 불태웠다.
휘몰아치는 성난 빛의 폭격 앞에서 성왕의 검은 점점 더 그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루카스는 제일검의 말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검에 끝까지 저항하며 제일검의 눈을 노려보았다.
꺾이지 않는 의지.
마인이 되었을 때조차 끝에 가서는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자신을 억눌렀던 성왕의 계승자.
쾅!
빛이 폭발했다.
데몬베인이 크게 튕겨져 나갔고, 루카스의 팔이 피로 물들었다. 성왕의 검이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제일검은 이를 악물었다. 광소하는 대신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벌레처럼 죽는 거다.”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못 하고.
마치- 마치-
제일검이 루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루카스는 그런 제일검의 검을 똑바로 보았다.
초조함으로 가득 찬 제일검의 눈을 직시하며 생각했다.
‘소용없지 않아.’
또 다른 자신이 말했다.
지평으로 이어진 길에 선 그가 자신을 보며 말했다.
“네가 시간을 만들었어.”
모두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유더와 코델리아가 슬퍼하지 않도록, 스칼렛과 카이사와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엘룬과 키라라, 레드 게이트의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네가 구한 거야.”
루카스는 쓰게 웃었다.
제일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빛.
하늘에서 강림하는 그것!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일천 개의 마법구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어둠으로 가득 찬 지상에 태양의 눈부심을 덜해주었다.
츠콰학!
제일검은 급히 검을 휘둘러 마력구를 베었다.
검기로 마력의 흐름 그 자체를 베어 휘몰아치던 마법구들을 일시에 소멸시켰다.
쾅! 쾅! 쾅!
제일검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화려한 빛의 포효 속에서 직시하였다.
광익을 편 채 태양의 신위를 발하는 코델리아가 루카스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곁에서 유더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더 바이엘!”
제일검이 날카롭게 외치며 검기를 날렸다.
유더는 그것을 쳐내는 대신 칠문의 힘을 개방했다. 기세만으로 검기를 흩어버린 뒤 벨렌시아의 힘을 자신에게 더하였다.
“제일검.”
더 이상의 대화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제일검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유더를 마주한 순간 더욱 들끓기 시작한 초조함으로 스스로를 불태웠다. 지평을 노려보며 순백의 날개를 펼쳤다. 유더 역시 칠흑의 날개를 펼쳐 제일검을 향해 돌진했다.
빛의 검식 오의, 광익천상.
벨렌시아의 법, 흑익무극참.
순백의 날개와 칠흑의 날개가 격돌했다.
하나로 엉켜 세상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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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8장 - 검의 지평 #3 > 끝
< 제118장 - 검의 지평 #4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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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가 넘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닫고 만다.
&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
순백과 칠흑의 격돌이 레드 게이트 전체를 진감케 했다.
주변 일대가 초월적인 힘의 격돌로 초토화되었고, 견디지 못 한 레드게이트의 마법 방벽이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유더와 제일검의 격돌은 실로 백중세였다.
코델리아조차 눈으로 좇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코델리아의 품에 안겨 거친 숨을 몰아쉬던 루카스 또한 알 수 있었다.
제일검은 강하다.
지금까지의 제일검들 가운데 눈앞의 제일검보다 강했던 자는 없었다.
그는 최강의 제일검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지지 않는다.
지금의 유더는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루카스.”
“네, 코델리아 양.”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어지러운 기억의 혼재 속에서도 지금 현재의 자신들을 보았다.
아직 무어라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회귀가 아니었다.
평행 세계의 자신들도 아니었다.
트리거가 된 것은 유더.
솔라리의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 치러진 시험 속에서 유더가 깨달은 것.
유더가 지평으로 이어진 길에 서 있던 자신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생겨난 변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파이어 페어리 퀸이 했던 말.
솔라리가 했던 아리송한 이야기들.
‘네가 여기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처음이지. 처음이자 마지막에나마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야.’
‘과거는 언제나 미래를 향해 날아가. 고고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없는 법이야.’
유더에 이어 루카스가 트리거를 당겼다.
검은 사내- 검리에 닿았던 유더와 함께 했던 루카스와 마주함에 따라 도미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꿈이 아니야.’
유더가 트리거를 당기기 전에도 이미 몇 번인가 꿈을 꾸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닌 기억이었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꿈으로나마 볼 수 있었던 이유.
솔라리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던 이유.
“고마워.”
언제나 마지막까지 유더를 지켜줘서. 유더와 함께해줘서.
코델리아의 말에 루카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으켜 세워 주세요. 코델리아 품에 안겼다는 걸 유더가 알면 절 죽이려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게. 그러고도 남겠지.”
하나 둘 이해가 갔다.
코델리아는 루카스를 일으켜 세운 뒤 부서진 레드 게이트의 파편에 기대게 해주었다.
굉음이 이어졌다.
유더와 제일검의 격돌은 신과 신의 격돌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검이 한 번 교차할 때마다 마치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하늘과 땅이 울부짖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코델리아도 루카스처럼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제일검은 역대 최강의 제일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더가 이길 겁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지금까지 유더는 단 한 번도 제일검에게 패하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마인 듀크를 쓰러트려 왔으니까.
“그래, 믿고 있어.”
코델리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유더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검과 검이 섞인다.
어지럽게 빠른 흐름 속에서 서로 교차하고, 흩어지고, 다시 어울려 폭발한다.
단순히 거대한 기운의 폭발만이 아니었다.
현묘한 검술이 서로 간에 오갔다.
검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교차였다.
“아아, 아아아.”
서로가 서로를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유더와 제일검은 지평을 바라보았다. 지평을 향해 달려나갔다.
처음에는 비슷한 속도였다.
엇비슷하게 지평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일검은 지평을 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었다.
지평은 아직도 아득히 멀기만 하였다.
“괜찮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인이 되었다.
저 지평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불로영생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길이 점점 더 좁아져 갔다.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지평의 빛이 멀어져 갔다.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제일검 자신이라면 언제 어디서고 지평을 향해 나아갔을 터인데!
쾅!
유더의 공격에 제일검의 검이 크게 튕겨져 나갔다. 대등하게 맞서지 못하고 밀려났다.
쾅! 쾅! 쾅!
유더가 연격을 퍼부었다.
제일검은 이번에도 버티지 못 했다.
제일검의 검이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하악··· 학······.”
제일검은 거친 숨을 토하며 정면을 보았다.
지평이 보였다.
하지만 지평으로의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평으로의 길이 끊어져 있었다.
어째서, 왜, 대체 무엇 때문에!
기억이 밀려왔다.
마인 듀크의 기억들.
지평으로의 길을 스스로 닫아버린 그것들.
제일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울부짖고 말았다.
“독 따위에 의존했던 것이냐!”
마인 듀크.
검이 아닌 독을 특기로 사용하는 마인.
한 번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모든 듀크들이 그러하였다.
초조함을 느낀 진짜 이유.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몸이 떨려온 이유.
지금뿐이었다.
마인이 된 이후에도 제일검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듀크 대신 제일검으로서 스스로를 자칭한 것은.
유더나 루카스와는 달리 제일검 자신의 기억들은 지평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으아아!”
제일검이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기억들을 베었다.
모두 떨쳐내 온전한 자신이 되었다.
이미 닫힌 길을 억지로 연다.
실낱같은 길이라도 만들어 계속해서 나아간다!
쾅! 쾅! 쾅!
유더와 제일검의 검이 교차했다.
제일검은 유더의 검을 통해 지평을 보았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그곳을 느꼈다.
“아아아.”
닿고 싶다.
자신도 도달하고 싶다.
저 지평에.
저 아득히 먼 검의 지평에!
쾅!
검이 깨진다.
밀려난다.
하지만 제일검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러진 검을 버리고 마지막 여벌 검을 뽑아들었다.
지평에 대한 열망만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유더는 그런 제일검에 맞서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코델리아와 달리 유더는 알 수 있었다.
루카스와 스칼렛, 카이사와 달랐다.
오직 유더만이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서 있었던 것은 유더 자신이었으니까.
어린 신 아탈리아가-
플레이아데스의 세계신 아탈리아가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 그녀가 무엇을 하였는지 부분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것은 유더 자신뿐이었으니까.
회귀가 아니야.
평행 세계가 아니야.
모두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
과거의 기억들.
“유더.”
마인이 되어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은 코델리아.
자신과 최후의 최후까지 멸망에 맞섰던 코델리아.
모순 따윈 없었다.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 진실이 존재했다.
도미노가 넘어진다.
유더 자신을 시작으로 루카스로, 코델리아에 이어 스칼렛과 카이사로- 기억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트리거가 당겨지기 전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존재들.
“으아아!”
제일검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유더가 그런 제일검을 향해 바람의 검을 펼쳤다.
풍뢰열광참이 제일검의 검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유더는 마침내 도달하였다.
이미 한 번 지나갔던 그 길의 끝에 당도하였다.
검의 지평.
도달했기에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평에 닿은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충분했다.
검리.
검의 지평에 닿은 자만이 담아낼 수 있는 것.
제일검의 검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유더의 검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 했다.
위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술에 있어서 근본적인 격의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제일검은 힘을 폭주시켰다. 마인으로서의 힘을 모두 개방하며 당장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유더에게 덤벼들었다.
유더가 도달한 지평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 지평에 조금이라도 닿고 싶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일검은 제자리에 넘어졌다.
겨우 다시 연, 실처럼 가느다란 길 위에 주저앉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평을 바라보았다.
“아아, 저것이.”
저것이 검의 지평.
너무나 닿고 싶은,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칠흑의 검기가 제일검의 가슴을 베었다.
검붉은 피를 주륵 흘리며 제일검이 제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지평에 닿고자 발버둥치던 그는 이미 마인이 아니었다.
끝없는 동경과 깊은 한이 담긴 제일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쓰러진 그의 몸은 재가 되어 흩어지는 대신 차갑게 식어갔다.
유더는 긴 숨을 토했다.
검리에 닿고, 제일검을 쓰러트린 순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구천구문의 여덟 번째 문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천구문 제팔문.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 가운데서는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 했던 전인미답의 경지.
유더가 손을 뻗었다.
제팔문을 개방하였다.
&
도미노가 넘어졌다.
트리거가 당겨졌다.
그랬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아니,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겠지.”
어린 신 아탈리아는 고개를 들며 그리 말하였다.
예견된 일이었다. 너무 많은 시도가 있었다.
초월적인 존재들이라면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그리 된 것이었구나.”
음욕의 군주 아스모데우스가 웃음을 흘렸다.
서쪽 숲의 마녀는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스모데우스의 미소를 본 순간 그녀는 그가 진실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귀가 아니야.”
회귀는 불가능해.
우주 전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설사 세계신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야.
“평행 세계가 아니야.”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설사 존재한다 할지라도 정말 평행 세계의 일이야.
우리 세계의 일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것이었더냐?”
대소환제로 말미암은 플레이아데스의 멸망.
그 뒤에 이어진 진정한 파국.
유더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싸워주었다.
때로는 자신의 연인인 코델리아를 베어가며, 때로는 코델리아와 함께 끝까지 저항하며-
하지만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언제나 플레이아데스의 멸망이었다.
천계와 지옥의 싸움터가 된 플레이아데스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해야 해.”
오랜 과거의 아탈리아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은 가능해.
시간에 시간을 이어붙인다.
아니, 사실 시간을 다루는 것조차 아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한다.
지금 현재- 멸망한 플레이아데스에 과거에 존재했던 멸망하기 이전의 플레이아데스를 다시 이어 붙인다.
“도도한 시간의 흐름은 아무도 어찌할 수 없어.”
하지만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과거를 복제한다.
복제한 과거를 현재에 이어 붙여 다시 한 번 시작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0년부터 시작한다.
이때를 세계력 0년이라 가정한다.
30년의 시간 끝에 플레이아데스가 멸망했다.
0년부터 시작했으니 지금은 세계력 30년이다.
다시 한 번 시작하기 위해 0년 시점의 기록들을 그대로 복사해 세계력 30년의 끝자락에 붙인다.
세계력 31년부터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래도 실패한다면?
세계력 60년의 끝자락에 세계력 31년의 기록을 붙여넣는다.
시간은 미래로 흘러간다.
거스르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다시 한 번 플레이아데스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대단해, 탁월해. 회귀가 불가능한 마당에 우회로를 통해 거의 같은 결과를 이끌어냈어. 더욱이 우주 전체가 아닌 플레이아데스와 천계, 지옥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니 우주 전체를 어찌하는 것에 비하면 현실성도 있고. 하지만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군.”
아스모데우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탈리아가 택한 방법은 분명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다시 시작된 세상의 누구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 했다.
심지어는 세계신인 아탈리아 본인조차도.
“물론 조금씩 단서를 남길 수는 있었겠지. 우리가 위화감을 느낀 것처럼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는 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 더욱이- 주사위는 던질 때마다 다른 숫자가 나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너무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탈리아는 연전연패하였다.
매번 다른 상황이 펼쳐졌지만 종국에는 언제나 약속된 파멸이 다가올 뿐이었다.
기록을 이어붙여 다시 한 번 시작할 때마다 플레이아데스는 세계의 힘을 잃어갔다.
누적되어 있던 세계의 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아탈리아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방법을 선택해 보았다.
그 선택으로 인해 몇 번 더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야 했지만, 마지막 단 한 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하지만 아탈리아. 지금은 잘 알지 못 하는, 하지만 과거에 여러 번 대면했던 플레이아데스의 세계신아.”
너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유더와 코델리아의 활약으로 대소환은 사실상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간의 만행으로 인해, 그리고 지금 이순간 각성한 기억들로 인해 아탈리아는 예상치 못 했던 적을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였나.”
높은 곳에서 도도히 바라보기만 하던 네가 그리 행동한 것은.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천계- 그 땅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는 자.
“용납할 수 없다.”
심판의 대천사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너희는 플레이아데스의 사정에 천계를 말려들게 하였다.”
다시 시작한 것은 플레이아데스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플레이아데스의 멸망에 연관되어 있던- 대소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플레이아데스와 연결점이 갖게 된 천계와 지옥 역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천계를 유린한 그 행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순리를 농락한 그 행동 역시 허할 수 없다.”
그러니 되돌린다.
역사를 본래 가야할 길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소환은 일어나야 한다.”
그로 인해 플레이아데스가 멸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애당초 솔라리를 희생시킨 저주받을 땅이었다.
지옥과 결판을 내기 위해서는 전장이 필요했다.
“대소환의 그날까지 힘을 합치겠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가 즐겁게 말했다.
심판의 대천사 아우리엘은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우리엘!”
진실을 깨달은, 아우리엘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이해한 라구엘이 소리쳤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아우리엘은 라구엘의 외침을 무시했다.
거듭된 위화감으로 인해 준비하게 된 자신의 대행자에게 명하였다.
“시작해라.”
“따르겠습니다. 높은 곳의 목소리시여.”
막시밀리언 데 아비스.
플레이아데스의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남부에 자리한 왕국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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